PROLOGUE · 대표의 글

도면 만들기와 그림그리기

ON DRAWING & PAINTING — 종이 위의 작업

종이 위의 작업이란 게 있다. 이것은 보통 작품에 대한 구체적인 작업 전에 이루어지는 평면, 입면 혹은 투시도 등의 스케치를 하는 과정을 일컫는다. 이를 통해 최종안에 대한 형태나 평면·단면상의 기능 등을 구상해 나가는 것이다.

헌데 이 말이 갖는 또 다른 뜻이 있는데, 그것은 종이 위에서만의 작업을 뜻하는 것이다. 즉 건축도면의 작성이나 디테일에 대한 내용보다는, 종이 위에서 표현되는 효과 그 자체를 중요시 여기고 여기서 작품성에 대한 만족을 얻고자 하는 행위에 대한 표현이다.

어떤 경우에는 전자와 후자가 한 작가에게 모두 포함되기도 한다. 다른 분야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모름지기 대다수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건축, 특히 건축설계에 있어서만큼은 그 부분이 확연하게 구별된다.

작가별로 다양한 성향이 있는 것도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지만, 이러한 종이 위의 작업 — 특히 후자의 경우 — 작가마다 독특하고 개성 있는 표현들이 만들어지고 그 자체만으로 발표되어진다.

그리고 서두에 얘기한 대로 이러한 작품들은 건축의 최종적인 결과인 건축물로 완성되지 않은 채 종이 위에서만 표현되고 말며, 심지어 작가 자신이 그것을 완성작이라 말하는 경우도 생기게 되었다. 그만큼 건축물을 완성하기까지의 구상에 대한 생각은 다양하다는 것일 게다.

일례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라크 출신의 여류 건축가 자하 하디드의 그림들을 보면, 과연 이것이 건축물을 완성하기 위해 작도한 것인지 그냥 그림을 그리기 위해 처음부터 그렇게 작업한 것인지가 분명하지 않다. 물론 이 작가의 작품이 하나도 실체화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상당한 정도의 작업이 종이 위에서 끝나고 있다.

세계적으로 성황리에 열리는 자동차 쇼에는 굴지의 회사들이 성능이나 디자인 면에서 놀랄 만한 제품들을 내놓는다. 대개가 곧 출시될 모델이거나 기존 제품에 여러 향상된 요소를 부가한 경우들이다. 그런데 이 쇼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역시 컨셉트카라 일컫는 예비 상품, 혹은 연구개발 대상 차량이다. 이것은 말 그대로 앞으로 이루려는 기능이나 디자인의 상상을, 상용화 단계는 아니더라도 미리 제시해 보는 작업이다.

이러한 작업이 반드시 실용화 단계까지 가지는 않는다는 실험적 부분이, 종이 위에 작업하고 마는 건축설계의 그것과 상통하는 데가 있다. 이런 자동차의 생산 과정에도 필히 설계라는 단계가 있을 것이고, 그 단계에서 작업하는 작가들 중에 종이 위에 작업만 하고 마는 이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들 중 어떤 이는 작품이 시원찮아 시연의 기회조차 갖지 못하고, 혹 어떤 이는 종이 위에서 하는 작업에 심취한 나머지 아예 제작 불가능한 모양으로 치달아 버리기도 한다. 이쯤 되면 이러한 작업은 이미 본연의 분야에서 떨어져 나올 수밖에 없는 별개의 일로 여겨져야 한다고 본다.

두 작업의 목적부터 보면, 본질적인 출발은 무언가 대상물을 만드는 기본 작업으로서의 설계라는 공정이었는데, 이렇게 분리되는 작업에서는 대상물을 만들지 않아도 실패했다거나 무의미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이미 지면 위에서 생성된 내용 자체가 무언가를 만들어 낸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그 분야에 관련이 없는 사람의 시각이나 감성으로도 그런 류의 제작물은 시각적으로 감각의 변화를 느끼게 만든다. 즉 아름답다거나 멋지다는 감정을 유발한다.

아직 전문적으로 종이 위의 작업만 하는 작가는 없고 그런 작업을 상품으로 구매하는 경우도 없기에 별개의 분야로 독립되지는 않았지만, 결국 이러한 새로운 분야가 나타나리라 가정하기는 어렵지 않다. 요즈음 다양한 컴퓨터 그래픽 프로그램들이 표현해 내는 효과는 이런 작업을 더욱더 활발하게 한다.

여기서 기본적인 질문을 하나 해 본다면, 종이 위에서 표현된 현란한 모양들에서 느껴지는 감정을 그것을 기초로 완성된 건물에서도 느낄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질감이나 컬러, 스케일과 같은 요소들을 배제하고서도 그렇지 않다고 답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더구나 설계도면을 읽을 수 없는 일반 감상자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그렇다고 이 사람들이 그 종이 위의 작업이 무엇을 말하려는가를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그것이 건물 설계를 위해 이루어진 작업의 결과물이라는 정도는 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작업물과 건물과의 비교나 상호관계에는 관심이 없다. 건물은 건물대로 그 안에서 거주하며 느끼거나 외부에서 전경을 감상하는 것이고, 종이 위에 해 놓은 것에 대해서는 그 자체로 별도의 감상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련의 사항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실체의 건물은 배제하고, 그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전에 진행했던 작업들만을 가지고 건축적인 논쟁을 할 만한 성과물들이 나오고 있다. 이런 상태를 되짚어 보면, 건축의 본질을 개입시키지 않고 건축을 이야기하는 오류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종이 위의 작업을 억지로 건축 분야에 종속된 일부분이라 항변할 게 아니라, 엄연히 새롭게 탄생된 예술 장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다양한 분야의 구축물과 제조물들이 생산되고, 그것들이 독립되거나 융합되면서 생활환경을 변화시키고 있는 이 세대에, 건축 분야에서의 기능이나 환경 또한 상상을 초월하여 진화하고 있다.

수많은 고민과 실험, 디테일과 재료에 대한 탐구를 통한 건축설계 작품이 완성 후에 사용자에 의해 평가되어지듯, 개념설계를 비롯한 종이 위에서의 작업 또한 또 다른 시각으로 평가받고 의미를 부여받아 건축계를 구성하는 일원으로 자리매김하여야 할 것이다.

박찬원 · 대표건축사
PARK CHAN-WON · PRINCIPAL ARCHITECT